kick, clap, 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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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안과 밖



우리는 지구인이기 때문에 지구에 대해 생각할 수 있고 지구 밖인 우주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영하의 추운 겨울에 우리가 밖에 있다고 생각해보자. 점점 혹독한 추위를 견디기 힘들어질 것이다. 더 견딜 수가 없어 따뜻한 난방이 있거나 그 추위를 어느 정도 막아줄 수 있는 실내로 들어오게 된다. 정도에 따라 이것은 생존의 문제로 직결되며 고대로부터 인간은 안과 밖의 문제를 필수적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밖은 일종의 위험지대이지만 동시에 이 밖이 있어야 존재의 유지가 가능해진다. 이제 안과 밖의 상호작용이 있어야만 존재의 지속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생존에 필요한 필수 요소는 밖에서 확보하며 안은 밖의 위험으로부터 존재를 보호하는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안과 밖의 문제를 더 큰 단위로 생각해보자. 지구의 생성에 관련된 역사를 모두 개괄할 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은 유추는 가능해진다. 우주를 떠돌던 먼지들이 서로 부딪치며 일부는 더 잘게 부수어지고 일부는 더 크게 뭉쳐지는 과정을 통해 생성된 물렁물렁한 금속성 고체 덩어리에서 시작한 지구는 우주의 여러 민감하고 복잡한 우연적 조건들 속에서 매우 운 좋게 태양과 이상적으로 안정화된 위치와 거리를 점유하고, 그 위치 확보에 따른 거대하고 반복적인 회전 형태를 보이게 된다. 이 조건 속에서 점점 자체의 열이 식어가고 대기가 형성되며 공기가 생성되게 되었다. 이 대기의 형성은 우주로부터 직격하는 지구 생명의 탄생에 해가 되는 모든 종류의 방사선들을 걸러내고 필요한 것들만을 통과시키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말을 음향 기술적으로 생각해 보면 지구는 우주라는 모든 혼돈과 불확정성인 노이즈의 총체에서 지구라는 특정한 조건으로 패턴화되고 필터링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지구라는 이름의 필터가 작동하여 지구 밖으로부터 지구 생태계가 생성될 수 있는 선별된 조건들만이 통과하여 지구 위에 생명의 싹을 틔운다. 이렇게 태어난 생태계는 지구라는 거대필터에 의해 걸러진 것들이 이루어내는 현상이기 때문에 그 필터의 기본적인 메커니즘을 생명 탄생 단계에서부터 내장하게 되는 지구 생명체는 지구의 바깥인 우주로 나가서 생존할 수가 없게 된다.

이제 고대인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낮과 밤의 시간을 경험한다. 고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신들의 특징과 능력은 하나의 지구 필터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특성을 갖춘 다종의 필터들과 기능을 상징한다. 이제 생존을 위한 안과 밖의 개념은 점점 더 그 개념이 지시하는 대상들의 범위들을 확대하기 시작한다. 문명이 진화를 거듭하고 어느 시점에서 지구가 둥글며 지구의 대기권, 즉 지구 필터의 경계선을 넘어서면 우주가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에 와서 인류는, 고대인이 육지의 바깥으로 인식하던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느꼈던 경외감, 도전 의식을 지구의 밖인 우주에 투영한다.

이 모든 과정 속에는 언제나 소리의 문제가 있었다. 공기가 등장하면서 소리 또한 같이 등장하였다. 소리는 고대인들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 고대인이 현대인의 모습에 가까워지기 전부터 존재했다. 고대인들에게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어떤 외부의 위협을 감지하는 경계신호에 가까웠을 것이고 천둥소리와 같은 것은 자신들보다 훨씬 오래된 존재의 분노처럼 느꼈을 것이다. 현대의 우리가 녹음된 숲의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안도감을 얻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근원적인 공포에 가까웠을 것이다.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공기를 타고 안으로 흘러들어오며 안의 크기와 재질, 각도 등에 의해 반사되는 반향을 통해 공간의 성질과 크기를 더 다층적으로 인식하게 했다. 고대인이 지금의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더 넓게 들을 수 있었고 위협의 강도가 강했던 만큼 긴장한 상태로 집중하여 듣기에 그 소리가 무엇인지 구분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현대인은 고대인이 가졌던 밖의 위협보다 훨씬 안전하게 느끼기 때문에 국가, 도시, 마을, 집이 가져오는 좁고 촘촘한 공간의 난반사를 거의 신경 쓰지 않으면서 동시에 들려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게 되었다. 안전한 환경을 추구하고 거기에 적응하면서 넓고 섬세하게 듣는 능력만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청각적 세계를 더 안쪽으로 깊게 끌어오는 상상력도 상실함으로써 지금의 세계는 시각 중심적이고 그 외의 감각을 부수적으로 다루는 세계로 흘러오게 되었다.

평균적으로 주파수 20 Hz에서 20 kHz는 가청주파수라고 하여 인간이 소리를 인지할 수 있는 범위로 알려져 있다. 이는 인간의 청력도 가청주파수의 범위만을 들을 수 있도록 필터링 되어 있음을 알려준다. 생물학적으로 왜 그렇게 진화해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다른 지구 생명, 예를 들면 박쥐와 돌고래도 서로 다른 필터링 된 가청주파수 범위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 사실을 알 수는 있어도 왜 그런지는 이유를 모른다. 청각에 관련하여 지구의 모든 생명체는 고유한 필터가 적용된 생물학적 구조로 되어 있고, 즉, 모든 생명체가 지구 필터가 작동하여 발생하는 모든 지구상의 소리를 극히 일부분만을 인식하고 그 외에는 존재하지만 없는 것으로 인식하기 쉽다.

당신이 말소리를 낼 때, 자신의 목소리를 인지한다. 하지만 마이크로폰을 통해 증폭되거나 녹음된 자신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어딘지 자신이 평생을 기억하던 그 목소리가 아닌 조금 낯선 기분이 들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말을 할 때, 발성 기관인 입을 통해 자신의 귀로 전달되는 소리에는 바깥의 공기에 먼저 노출되어 자신의 귀로 전달되는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턱뼈를 통해 뇌로 전달된 진동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이크로폰은 공기 중에 노출된 소리의 진동만을 받아들인다. 엄밀하게 말하면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타자는 당신이 듣는 자신의 목소리가 아닌 마이크로폰과 앰프를 통해 증폭된, 자신에겐 조금 낯선 그 소리로 인지하고 있다. 당신 스스로가 낯설어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타인에게는 당신의 고유한 목소리로 기억되는 것이다. 또한 마이크로폰으로 어떤 공간의 소리를 녹음하여 듣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당신에게는 공간에서 들었던 소리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녹음된 결과를 들어보면 당신이 실제로 들은 것보다 훨씬 많은 소리가 녹음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실제로 듣는 것보다 우리에게 익숙한 소리에 심리적으로 더 강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심리적으로 익숙한 소리는 선명하게, 그 외의 소리는 마치 안 들렸던 것처럼 뇌가 인식하기 때문이다. 이는 귀를 통한 청각작용이라기보단 뇌의 작용이라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우리가 듣는다는 것은 귀만이 아니라 뇌도 듣는다. 뇌는 익숙한 심리 작용을 이용해 소리를 필터링한다. 하지만 기계인 마이크로폰은 그러한 뇌의 심리라는 필터 기능 없이 오로지 공기를 통해 전달되는 진동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가 어떤 공간, 어떤 상황에 있을 때 뇌가 익숙한 것을 중심으로 반응케 하는 관성, 즉 들리는 것을 없는 것으로 외면하는 것을 넘어선다. 이는 마이크로폰을 통해 증폭하거나 녹음을 한 소리는 우리의 귀로 듣는 것보다 더 실제적일 수 있음을 알려준다. 소리의 안과 밖의 개념은 이제 자연과 환경과의 개념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신체의 내부와 외부의 상호작용과도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의 귀가 뇌의 필터 기능 없이 순수한 가청주파수 영역의 소리를 더 선명하고 정확하게 인지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세계는 매우 다르게 인지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 익숙한 소리여도 어딘지 낯설게 인지되는 그 부분이 고대인들이 밖의 위험한 환경에서 느꼈던 청각적 경계신호처럼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듣는 모든 일상 속 소리는, 사실 귀와 뇌를 통해 필터링되어 누적된 기억들이 합성된 것이다. 극도로 필터링 된 소리가 합성된 현재의 소리에서 우리가 절대로 제거할 수 없는 것은 뇌가 필터링을 하기 전에 작동하는 귀가 듣는 소리이다. 귀는 뇌가 어떻게 걸러내든 여전히 생각보다 많은 것을 듣고 있다. 우리가 귀를 통해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를 의식적으로 더 듣는다면 뇌도 점점 그것에 적응을 하게 될 것이다. 이제 과거의 인류가 바다를 육지의 바깥으로 바라보면서 가졌던 경외감과 도전 의식을 현대의 우리가 가청주파수의 내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 바깥에 존재하는 소리를 향해 가져볼 기회는 여전히 존재한다.

류한길

kick, clap, hat:
위상 전환_시청각의 분절과 충돌, 그리고 전복의 순간으로부터



시각의 체계는 형태와 개념을 토대로 대상을 식별, 구분, 명명에 이르기까지 여타의 감각에 비해 선명한 작업이 가능하기에 압도적으로 방대한 목록을 구축할 수 있었으며, 그런 연유에서 적어도 서구의 합리적 근대성을 구축하는데 가장 적화된 감각이었다 할 수 있다. 반면 인간의 감각 중 가장 먼저 발달하는 청각은 대상을 분명하게 규정하는 능력에서는 시각보다 다소 뒤떨어지지만, 동시에 망막의 일방향적 프레임 너머를 감각하게 함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존재를 느끼게 한다. 다시 말하자면, 시각은 이미지의 정밀함으로 대상에 신뢰성을 부여하지만, 동시에 그 선명한 해상도는 프레임 안에 국한됨으로 형태 바깥의 존재를 감지할 수는 없다. 반면, 시각적 명료함에 비한다면 모호한 청각적 경험은 화각 밖의 상황이나 환경, 또 다른 존재를 감지하게 함으로 대상을 그 형태 너머 문맥 안으로 위치시키고 프레임 바깥의 확장된 서사로 인도한다.

안정주는 시각 중심의 문화가 주를 이루는 오늘날 ‘소리’라는 청각적 경험에서 비롯된 시감각 너머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그의 작업은 주로 영상 매체의 형식을 취하곤 하지만, 작업의 서사를 추동하거나 표피적 이미지를 초월하여 정서를 충동하는 장치로 시각이 아닌 청각을 중심에 놓곤 한다. 이를테면, 4개의 채널에 싱크를 맞춰 상영되는 허물어지는 건물의 모습은 말미에 잔해를 뒤덮는 희뿌연 먼지 위로 풍경을 잠식하던 공사판의 소리만을 공허하게 남기며 특정한 정서를 유발하거나(Breaking to Bits, 2007), 어지럽고 빠르게 돌아가는 소주 공장의 제작 공정에서 특정한 규칙을 찾아내어 그 위에 병과 기계가 만들어내는 소음을 편집, 재생함으로 공장 시스템의 반복과 규율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압도감의 틈새로 특별한 운율을 주입하며(Bottles, 2007), 통일된 행동 양식을 훈련함으로 집단의식과 소속감을 함양하고자 하는 제식 훈련의 이미지와 사운드를 자의적으로 쪼개고 단위화하여 편집함으로 절도와 규율의 강박 사이 독특한 리듬의 공간을 창출한다. (Drill, 2005) 그리고 작가는 근래에 들어올수록 사운드가 가진 속성을 통해 기존의 체제나 시스템의 균열을 읽어내고 사회/정치적 맥락 아래 소리의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영원히 친구와 손에 손잡고〉(2016)에서는 1988년과 1992년 개최된 서울 올림픽과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공식 주제가를 리믹스하여 만든 노래로 교차 편집된 두 음악의 뮤직비디오를 장식한다. 국가 주도 하의 민족성 고양 및 결속을 다지기 위한 노래(들)는 영상이 나오는 오래된 아날로그 텔레비전의 저해상도 이미지나 노이즈, 글리치와 맞물리며 감각적 균열과 긴장을 생성하고, 국가적 차원의 이벤트 저변에 깔린 갈등과 모순의 현실을 환기하게 한다. 또한 〈Smoke〉(2018)는 5.18 민주화운동을 배경으로 일곱 편의 영화를 선정하여 사건에서 이탈한 인물들의 사적 대화를 추출하고 이를 인지하기 어려운 사운드로 편곡하여 광주의 역사적 장소를 배경으로 플레이한다. 이러한 방식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역사적 서사와 장면으로부터 벗어나 정치적 이해 안에서 집단을 대변하기 위해 개인화된 목소리를 빌리는 대중매체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공식적 역사로부터 소멸된 개인의 목소리를 회복하고자 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안정주의 초기작에서 근작에 이르기까지 소리를 대하는 방식에 어느 정도의 변화는 있지만, 작품의 중심에 사운드를 두고 정치적인 가능성을 모색하며, 비판적 사유를 촉발한다는 점만큼은 그의 작업이 일관적으로 견지해온 태도라 할 수 있다.

모든 감각의 우위에 시각을 두고 재편을 시도하는 동시대 예술의 (전시) 형식 안에서 청각의 주도 아래 의미를 획득하려는 작가 고유의 작법은 본 전시 〈kick, clap, hat〉에서도 이어진다. 작가는 먼저 대중매체나 방송, 일상 등으로부터 네 개의 소리를 선별, 추출한다. 이는 휴대폰을 통해 서로 다르게 반복되는 일상에 공동의 메시지를 전송하는, 어쩌면 오늘날 가장 익숙한 소리가 되어버린 재난 문자 경고음, 정상 회담이 이루어지던 어느 날 방송을 통해 송출되던 도보 다리 위 각국 정상의 소거된 음성을 대신하던 새소리, 국가적 위험을 알리는 경보장치 사이렌이 내뿜는 일정한 음높이의 소리, 마지막으로 물리적 실체가 부재한 공포 영화 속 유령의 소리가 그것이다. 작가는 이 채집한 사운드를 기반으로 음악을 작곡하고, 이를 다시 다른 작곡가와 협업하여 또 다른 음악으로 변형한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이 소리는 안무로 번역되고, 영상으로 기록되며, 3D 시각 환경인 VR로 다시 옮겨짐으로 기존의 영상 언어가 갖는 화면의 밖-크롭된 화각 너머 공간과 무용수, 악기를 다루는 연주자와 이 모두를 촬영하는 촬영자에 이르기까지-을 다시 화면 안으로 가지고 들어온다. 새로운 형식과 형태로의 연쇄적 번안과 함께 중요한 것은 외화면의 존재, 즉 사운드의 위치와 역할인데, 안정주는 전시 안에서 시각이 선사하는 극적으로 선명한 서사보다는 그것을 교란하는 청각적 경험을 통해 프레임 너머로 확장하는 가능성에 집중하고자 한다. 2층의 메인 전시장에서 마주하는 VR은 초현실적 감각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시각에 의존하는 기계 장치로서 온전히 눈을 통해서만 현상을 관찰하게 될 뿐이다. 작가는 기기 안에 펼쳐지는 가상의 공간에 또 다른 레이어의 장소와 균열을 삽입하며, 눈앞의 이미지와 어긋나는 소리는 그 기원을 확인하기 위한 관객의 수고를 부추긴다. 게다가 이는 다시 또 외부의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리에 의해 흐트러짐으로 시야에 잡힌 풍경은 붕괴되고 안과 밖이 교차하며 발생하는 감각의 전이 한가운데 관객을 위치시킨다. 또한 3층의 메인 공간에는 빛을 투과하는 구조물에 영사, 산란하고 있는 다채널의 영상 작업이 있다. 구조는 이미지가 고정되는 것으로부터 저항하는 동시에 영상의 서사를 계속해서 분절시킴으로 마치 빛의 조각을 꿰는 듯한 사운드만이 온전한 궤적을 그리게 된다. 이와 함께 아넥스에 위치한 작업 역시 장막 뒤 소리의 근원, 시각화되지 않은 그림자 존재를 환기하거나,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반복 재생하는 움직임의 영상에 어디선가 흘러들어와 개입하는 음향으로 소리 고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렇게 전시는 이미지-외형의 바깥에 다가서기 위해 근원과 출처를 밝히지 않는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시각에 포착된 대상이 무엇인지 인지하기 어려워질수록 화각의 바깥, 외화면의 음성 존재(acousmatique)는 우리가 딛고선 공간과 장소를 독창적으로 입체화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처음의 사운드에서 시작해 시각적 이미지의 옷을 입기까지, 그리고 그것이 다시 분절되고 해체되어 물리적으로 분리된 공간에 위치하면서도 감각을 변주하여 공간과 공간을 연결해내는 전시의 방식은 이를 더 극대화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크게 네 개의 공간과 그것을 잇는 복도와 계단으로 이루어진 전시장의 물리적 구조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하는데, 플롯과 플롯 사이, 그러니까 이 전시에서는 공간과 공간 사이 (이동) 시간의 기장을 넓히고 이미지의 잔상을 흐릴수록, 외화면의 존재는 내화면을 압도하게 된다. 그렇게 전시는 전주곡prelude과 같이 추상적 이미지의 포스터와 공간을 울리는 음악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로 관객을 맞이하며 시작한다. 그리고 각각의 공간을 채우는 사운드-이미지 작업들, 그리고 그사이를 메우는 계단과 외부 통로 –프롬나드promnade-로 이어지는 구조, 즉 외부(내부)에서 내부(외부)로 이어지는 동선을 따라 소리와 이미지가 충돌하고, 침투하며, 쉽게 규정할 수 없는 감각의 흐름 안으로 관객을 이끈다.

이렇듯 〈kick, clap, hat〉에서 사운드는 매체에서 매체로 번안되는 과정에서 물리적 신체를 가진 존재나 시각적 이미지와 매끄럽게 연동하기보다는 분절되어 미끄러지기를 반복하며, 눈앞의 상황은 출처와 문맥을 계속해서 변이하는 청각적 경험을 통해 심상을 자극하는 사건이 된다. 여기서 전시를 깨우는 감각의 추동은 작가가 추출한 소리와 공간의 반향 안에서도 작동하지만, 동시에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 그 탈주와 번역의 연쇄 속에서, 그리고 그것과 조응하는 관객의 움직임에서도 발생하게 된다. 앞서 말했듯, 안정주는 주된 시청각 매체인 영상 내에서 소리와 이미지 사이의 관계성에 주목하고, 이를 전복함으로 가능해지는 음향 고유의 정치적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한다. 이는 시각 이미지-현상 주변을 부유하며 해석의 경로를 다각화하는 진입로로서 소리를 제안하거나, 특정 이미지-서사로부터 떨어져나와 소리 그 자체에 내재하는 다층적 맥락, 즉 사회, 문화, 정치, 역사적 사유를 촉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전시에서 사운드는 이미지와 함께 하나의 장소, 그리고 거기에 존재했던 신체와 도구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이 둘은 서로를 배신하고 불화함으로 이미지와 사운드 사이 모종의 균열로 가시화한다. 이는 이미지를 보완하고 현장을 서술하는데 동원되는 사운드가 아닌 ‘소리’를 ‘소리’의 성질에 입각해 사고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미지가 음향을 뒷받침하는 상황에서 서사를 추동하는 주권을 획득한 사운드에 귀 기울이며, 청각에 의해 교란되는 이미지를 마주하는 전복적 감각의 경험에서 발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쩌면 시각을 넘어서는 청각의 우위는 이성과 지식을 토대로 대상을 판단하기보다는 정서와 감흥의 방식으로 대상과 온전히 조응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본 전시는 시청각의 분절과 연동, 미끄러짐과 보완, 개입과 충돌, 조화를 종횡으로 가로지르는 과정에서 개인의 기억과 지식, 현재의 경험과 감정을 자유롭게 충동하여 현재를 새롭게 감각하기 위한 태도를 묻고, 범람하는 시청각 이미지로 조율되는 ‘오늘’이란 거대한 슬로건 아래 함몰된 다양한 명제를 확인토록 한다.

김성우